문제의 정의와 접근,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보자.
솔루션저널리즘네트워크에서는 “해법의 작은 조각을 찾으라”고 조언한다(As reporters we are often looking for the very, very perfect solution. But when it comes to really big problems you are often more likely to find small slices of a solution.). “여러분, 이것만 하면 됩니다, 제가 세상을 구원할 해법을 찾았어요.” 세상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면 좋겠지만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복잡하고 구조적이다. 하나의 문제를 풀면 다른 문제가 터져나오고 여러 문제가 꼬여 있거나 기회비용을 수반한다. 그래서 일단 작은 아이디어부터 시작해 보자는 게 솔루션저널리즘네트워크의 조언이다.
한 장짜리 체크리스트가 사람을 살린다.
2007년 12월 뉴요커에 실린 “목숨을 살리는 체크리스트”라는 제목의 기사는 해법에 접근하는 과정에 대한 몇 가지 힌트를 준다. 2차 세계 대전 때 ‘하늘을 나는 요새(flying fotress)’라고 불렸던 폭격기 B-17이 시험 비행에서 추락해 큰 충격을 안겨준 적 있다. 1935년 10월 30일, 미국 오하이오주 공군 비행장에서 군용 항공기를 구입하기 위한 시험 비행을 하는 도중이었다. 활주로를 뜨자 마자 100미터 상공에서 한쪽 날개가 꺾이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락했다. 조종사를 비롯해 승무원 5명 가운데 2명이 현장에서 숨졌다.
보잉의 B-17은 성능과 디자인에서 경쟁사들을 크게 앞섰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이미 공군의 대량 구매도 예정된 상태였다. 두 배나 많은 폭탄을 싣고 두 배나 더 멀리 날 수 있었지만 새로운 기능이 너무 많아 조종사들이 이를 모두 외운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였다. 조종사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기능이 너무 많다(“too much airplane for one man to fly.”)는 평가도 있었다. 결국 미국 공군은 보잉 대신에 마이클더글라스의 폭격기를 선택했다.
반전은 그 다음부터다. 자칫 보잉을 파산으로 몰고 갈 뻔 했던 B-17은 간단한 아이디어로 살아났다. 조종사의 숙련도 부족을 문제의 원인이라고 판단했다면 훈련을 더 많이 시켜야 한다는 결론으로 갔겠지만 공군 조종사는 최고의 베테랑들이다. 문제는 더 많은 훈련이 아니라 어떻게 실수를 최소화할 것인가였다. 시험 비행 사고 역시 기계 결함이 아니라 조종사가 브레이크를 실수로 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공군은 테스트 용도로 구입한 B-17을 점검하면서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확인해야 할 한 장짜리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기어 스위치는 중립으로, 연료 전송 장치는 잠겨 있어야 하고, 연료 차단 스위치는 오픈돼 있어야 한다, 오토 파일럿 기능은 꺼져 있어야 한다, 제너레이터가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자이로가 셋팅됐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등등이다.
이 체크리스트 덕분에 B-17은 180만 마일 비행에 성공했고 보잉은 1만 3000대의 주문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은 외과의사 아툴 가완디다. 가완디는 “복잡한 일을 많이 처리해야 하는 현대인이 실수와 실패를 피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체크리스트”라고 강조한다.
가완디에 따르면 미국에서 수술 도중 죽는 사람이 15만 명인데 이 숫자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의 3배 규모다. 가완디는 병원에 제대로 된 체크리스트만 있어도 의료 사고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거라고 제안한다. 실제로 피터 프로보노스트가 제안한 체크리스트를 도입한 병원들은 환자 사망률이 절반 정도로 줄었다. 가완디는 “현대 의학도 B-17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4만 명 이상의 외상 환자들을 조사한 한 연구에서는 1224가지 증상을 포함한 3만 2261건의 조합이 있었다. 가완디의 표현에 따르면 3만 2261대의 완전히 다른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것과 같은 모험을 일상적으로 치러야 한다.
뉴요커의 기사가 2007년 기사라는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솔루션 저널리즘이란 말이 유행하기 훨씬 전에, 그리고 기자가 아닌 의사가 솔루션 저널리즘의 모델 같은 기사를 쓴 것이다. 단순히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문제에서 해법의 아이디어를 얻고 작은 변화를 끌어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아이디어는 지나치게 단순해서 오히려 설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가완디에 따르면 의사들은 체크리스트가 필요하다는 프로보노스트의 제안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한 의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서류 나부랭이는 치우고 환자나 치료하죠.”
프로보노스트가 시나이그레이스병원 경영진을 처음 만났을 때 체크리스트를 도입하라고 요청하는 대신 카테터 감염 비율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확인해 봤더니 전국 평균을 웃도는 수치였다. 그때서야 이 병원도 ‘키스톤 이니셔티브’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그룹에 참여하기로 했다. 병원마다 프로젝트 매니저를 두고 한 달에 두 번씩 전화회의를 하는 모임이었다. 병원 경영진은 처음에는 투덜거렸지만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많은 병원에서 경영진과 의사들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경영진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걸 좋아하는 의사는 없다. 그런데 클로르헥시딘이 비치된 집중치료실이 3분의 1도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클로르헥시딘 구입 예산을 늘리고 새로운 의료 장비를 개발하는 등 변화가 시작됐다. 뉴잉글랜드의학저널에 따르면 미시간주에서 ‘키스톤 이니셔티브’ 프로젝트에 참여한 병원들은 18개월 만에 1억 7500만 달러의 비용을 절감하고 1500명 이상의 환자들의 목숨을 살린 것으로 평가했다.
갈색 초콜릿은 콘서트를 중단하라는 신호다.
가완디는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체크! 체크리스트’라는 책에서 로큰롤 그룹 밴 헤일런(Van Halen)의 사례를 소개한 바 있다. 벤 헤일런은 공연 기획사와 계약을 맺을 때 복잡한 조건을 요구하기로 유명했는데 이를테면 계약서 126번에 무대 뒤에 반드시 M&M 초콜릿 바구니를 두되 그리고 거기에 갈색 초콜릿이 섞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까다로운 조항을 넣는 게 대표적이었다. 만약 갈색 초콜릿이 하나라도 담겨 있을 경우 콘서트를 취소한다는 조건이었다. 실제로 콜로라도에서는 갈색 초콜릿을 문제 삼아 콘서트를 취소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 리드 싱어 데이빗 리 로스(David Lee Roth)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 갈색 초콜릿은 실제로 공연 기획사가 전체 체크리스트를 얼마나 꼼꼼하게 실행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지표였다. 만약 초콜릿이 준비돼 있지 않거나 초콜릿은 있는데 갈색 초콜릿이 섞여 있다면 전체적으로 준비가 소홀했다고 볼 수 있다. 계약서의 모든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갈색 초콜릿만 봐도 준비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우리가 공연할 때는 콘서트 장비를 가득 실은 대형 트레일러 9대가 이동했다. 그런데 기술적 실수가 너무 잦았다. 무대 바닥이 움푹 꺼지거나 대들보가 천장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거나 문이 작아서 콘서트 장비가 빠져나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우리의 계약서는 중국의 전화번호부처럼 두툼했다. 만약 갈색 초콜릿이 발견됐다면 우리 계약서의 모든 조항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신호고 어디에선가 실수가 발생할 거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가완디는 “복잡한 상황을 헤쳐나가고 위기를 극복하려면 반드시 체크리스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이 판단해야 할 여지는 항상 남겨둬야 하지만 그 판단은 체크리스트를 통한 절차의 도움으로 향상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좋은 체크리스트와 나쁜 체크리스트가 있다.
가완디가 소개한 파키스탄의 비누 실험도 흥미로운 벤치마크 모델이 될 수 있다. 미국질병대책센터에서 일하던 스티븐 루비라는 의사가 파키스탄 지부에 발령이 나면서 슬럼가에 비누를 공급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간단하고 뻔한 아이디어였지만 프록터앤갬블을 찾아가 비누를 무상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무렵 이 회사가 한창 밀고 있었던 트리클로카반이 들어간 비누와 들어가 있지 않은 비누 두 종류의 샘플을 받아 두 그룹에 나눠주고 손을 잘 씻는 방법을 알려줬다.
실험 대상이 된 가족들은 1년 동안 1주일에 평균 3.3개의 비누를 받았는데 1년이 지난 뒤 확인해 보니 비누 종류에 상관 없이 결핵 발병 비율이 48%나 떨어졌다. 설사는 52%나 줄었고 농가진도 35% 줄었다. 소득 수준이나 인구 밀집 정도, 심지어 어떤 물을 마시느냐와 별개로 손을 씻는 것만으로도 전염병 발병 비율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프록터앤갬블은 신제품 비누의 효능을 입증하고 싶었겠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단순히 비누가 아니라 비누가 생활 습관을 바꿨다는 것이다. 가완디의 분석에 따르면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비누를 정기적으로 공급 받으니 비누를 아낄 필요가 없었다. 실험 이전에 비누를 쓰지 않았던 게 아니다. 다만 경제적 부담이 줄어들고 비누를 아낌 없이 쓰라는 조언을 들으니 손을 더 자주 씻게 됐다. 둘째, 손을 씻는 방법이 달라졌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원래 손을 잘 씻는 사람들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손을 씻는다는 비율이 80%가 넘었다. 문제는 손을 빨리 씻고 용변에 관계된 손만 씻었다는 것이다. 비누 실험을 1년 동안 진행하면서 두 손을 완전히 물에 담그고 비누 거품을 풍성하게 낸 뒤에 씻어내라는 원칙을 따르게 됐다. 과거에는 용변을 본 뒤에만 씼었지만 이제는 음식을 준비하거나 아이들에게 음식을 먹일 때도 손을 씻게 됐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였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이렇게 아름답게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파키스탄의 비누 실험은 비누를 무상 공급하겠다는 비누 회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야말로 한시적으로 진행된 실험이었을 뿐이다.
보잉의 다니앨 부어맨에 따르면 체크리스트에는 좋은 체크리스트와 나쁜 체크리스트가 있다. 나쁜 체크리스트는 너무 길고 읽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거나 당장 뭘 하라는 건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무 직원들이 만들고 정작 현장에서는 외면하게 되기 마련이다. 좋은 체크리스트는 간단 명료하고 효율적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단계를 일깨워준다.
가완디가 소개한 호놀루루에서 출발한 유나이티드항공 비행기의 블랙박스 녹음 파일 내용은 체크리스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다. 비행기 파편이 날아다니고 소음도 엄청났다. 세 번째 엔진이 멈췄고 네 번째 엔진은 불이 붙었다. 날개 플랩의 바깥쪽 부분이 부서졌다. 폭탄에 맞은 것일까.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날까. 조종사들은 최대한 빨리 판단을 내려야 했다. 바다에 불시착시킬 것인지, 호놀룰루 공항으로 돌아갈 것인지 등등. 이들은 놀랍게도 체크리스트를 꺼내 들었다.
기장 : “내가 체크리스트를 읽을까요.”
기관사 : “내가 꺼냈습니다. 준비되면 말씀하세요.”
기장 : “준비됐습니다.”
이들은 체크리스트에 따라 고도를 낮추고 파손된 엔진을 정지시키고 무게를 줄이기 위해 연료를 버리고 호놀룰루 공항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했다. 이 체크리스트에는 명확한 정지 지점이 명시돼 있고 체크리스트를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해야 할 변수가 지정돼 있었다.